1980년대라고? 1980년대에 금성 탐사 프로젝트가 이미 있었고, 그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나라가 미국도 아닌, 구 소련이라고?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은 군사력뿐 아니라 우주 개발 경쟁에서도 치열하게 맞붙었다. 미국이 1969년 '아폴로 11호' 즉,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하자, 소련은 체면을 세우기 위해 새로운 우주탐사 목표를 찾게 된다. 그 선택지는 바로 금성이었다. 당시 금성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이면서도 그 환경이 알려지지 않아 탐사 난도가 높았다. 특히 표면 온도는 470도 이상, 대기압은 지구의 90배, 온통 이산화탄소에 황산비까지 내리는 지옥 같은 환경의 금성.
경제적으로 보면 1980년대 소련은 이미 체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경제 침체가 가속화됐고, 과도한 군비 경쟁으로 민생 경제는 악화일로였다. 하지만 체제 선전을 위해 우주 개발만큼은 손을 뗄 수 없었다. 우주 탐사는 군사기술과 직결되며, 체제 우월성을 대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기 때문이다. 소련은 민생보다 체제의 체면을 더 중시하며, 폐쇄형 국가 시스템을 통해 우주개발 프로젝트에 자원과 인력을 집중 투입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금성 탐사 프로젝트 '베네라(Venera)'. 사실 해당 베네라 프로젝트는 1980년대 보다도 훨씬 더 이전인 1970년대에 '베네라 7호'라는 착륙선이 금성으로 한 차례 발사된 사례가 이미 있었다. 이 역시도 '인류 최초'로 금성 표면에 착륙하여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약 20분 만에 사실상 실패로 끝났고, 10년 후인 1982년에 발사된 '베네라 13호'는 착륙 후 120여 분간 살아남으며 금성 표면의 컬러 사진을 지구로 송신했다. 이 사진은 당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소련의 과학 기술력을 과시하는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
비록 탐사선들은 고온과 고압, 황산비 속에서 몇 분 만에 기능을 상실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얻어낸 데이터는 이후 금성 연구의 토대가 되었다. 경제 난 속에서도 소련이 금성 탐사를 강행했던 이유는, 미국의 성공적인 달 착륙 부분에선 본인들이 밀렸지만, 금성만큼은 앞서겠다는 체제 경쟁의 심리 때문이었다. 이 탐사들은 결국 소련의 마지막 우주개발 전성기를 상징하며, 이후 체르노빌 사고와 페레스트로이카 체제의 붕괴로 이어지는 등, 소련 몰락의 서막 속에서도, 묵직한 족적을 남기게 된 부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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